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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3 08:52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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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조권 침해 피해주민, 법원의 화해권고결정 보다 더 늘어난 피해보상금 요구
원주민 입주예정자들 공사지연에 따른 추가분담금 떠안아야 할 처지
인천시·동구청 등 제3자 중재위원회 협의 조정 통한 대책 마련 필요

일조권 침해로 공사가 3개월째 중지된 인천 동구 송림 파크푸르지오 정비사업 현장 모습.


[헤럴드경제(인천)=이홍석 기자]인천도시공사가 추진하고 있는 인천 동구 송림 파크푸르지오 정비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

인근 솔빛마을주공아파트의 일조권 침해 주장에 대한 법원의 화해권고결정에도 불구하고 솔빛마을주공아파트 측이 당초보다 증액된 피해보상금을 요구하면서 협의가 더욱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인천도시공사는 늘어난 피해보상금에다 공사 지연에 따른 손실비용을 부담하게 됐고, 원주민 입주 예정자들은 공사지연 추가분담금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13일 인천도시공사와 입주 예정자 등에 따르면 인천 송림 파크푸르지오 정비사업은 공사금지가처분 일부 인용에 따라 지난 7월 공사 중단 이후 3개월을 넘기면서 추가분담금 발생이 불가피하게 됐다.동행복권파워볼

인천지방법원은 정비사업 구역 인근에 있는 솔빛마을주공아파트 주민 180명이 “일조권 침해가 예상된다”며 제기한 공사중지가처분신청에 대해 지난달 17일 화해권고결정을 내렸다. 공사금지가처분 사건의 감정결과서에 따라 솔빛마을주공아파트의 시가하락분을 감정하고 시가하락분 상당의 금액과 40%를 더한 140% 금액을 피해주민에게 지급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같은달 21일 솔빛마을주공아파트 측의 이의신청서 제출로 공사 정상화에 제동이 걸렸다. 솔빛마을주공아파트는 화해권고결정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시가하락분 상당의 금액과 이에 대한 50%를 더한 150% 금액과 세대당 300만원을 피해보상금으로 지급해 달라는 의견을 다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도시공사 측은 “원고측의 의견 제시는 공사기간 연장 비용과 기업형 임대사업자에게 인도할 기간까지의 준공을 고려한 추가공사비용 발생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라며 “또한 피해보상금 증액 요청으로 인한 관리처분계획상의 예상 지출액 초과로 이미 사업비가 부족한 상황에 해당 사업이 관리처분방식으로 이뤄져 토지등 소유자에게 추가분담금이 부과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공사 재개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추가분담금 규모는 더욱 늘어나 원주민 입주예정자들의 부담은 더욱 커지게 된다.

도시공사는 지난 7월 9일 아파트 공사 8층 콘크리트타설 후 현재까지 3개월 동안 공사를 중단하고 있는 상태로, 공사지연에 따른 공기연장 비용도 상당액이 발생할 전망이다. 올해 안에 공사재개를 하지 못하면 오는 2021년부터 임대사업자에게 지연배상금을 지급하게 된다.

게다가 원고측의 피해보상금 증액 요청으로 관리처분계획상의 예상 지출액 초과로 이미 사업비는 부족한 상태이다.

도시공사 관계자는 “일조피해 대상 세대에 대해서는 원만한 합의를 통해 사업이 정상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원도심의 낙후한 지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시작한 정비사업의 취지를 공감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송림파크 입주예정자와 토지등 소유자들은 20년 전 솔빛마을 주공아파트 건설 시 겪었던 분진과 소음 피해를 상생 차원에서 감수했음을 토로하면서 이번에도 원만한 합의가 이루지길 바라고 있다.

입주예정자들은 “법원의 화해권고결정으로 피해보상금 협의가 잘 마무리돼 공사가 정상화 될 것으로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원고측의 피해보상금 증액을 요구하는 이의제기 신청으로 난감하게 됐다”며 “양측의 피해보상금 합의 문제로 인해 우리가 왜 피해를 입어야 하는지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한 입주예정자는 “추가분담금 규모를 최소화하고 솔빛주공아파트 주민뿐만 아니라 송림 파크푸르지오 입주예정자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은 빠른 시일내에 적절한 피해보상금 지급을 통한 공사 재개를 희망한다”며 “이를 위해 도시공사측도, 솔빛주공아파트측도 상호간 이해를 구해 3자가 피해와 손실이 없도록 하루라도 빨리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더욱이 지역주민들간의 갈등을 방지하고 도시공사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서라도 인천시, 동구청 등 제3의 중재위원회의 협의 조정을 통해 일조 분쟁이 마무리 될수 있도록 대책 마련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gilber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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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연합뉴스

[서울경제]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자신을 ‘조국 똘마니’라고 칭한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과 관련,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이 “김 의원의 대응이 조금 아쉽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박 전 의원은 12일 전파를 탄 YTN 라디오 ‘황보선의 출발 새아침’에 나와 “(김 의원도) 사실은 불쾌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군들 불쾌하지 않겠는가”라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박 전 의원은 “그냥 유권자나 시민이 그런 표현을 써서 본인을 비판한 것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진 전 교수 같은 경우에는 이른바 ‘빅마우스’ 아니겠나”라고도 했다.

박 전 의원은 이어 “진 전 교수가 페이스북이나 SNS에 남기는 글들은 거의 기사화되고, 이런 과정에서 모욕적인 표현을 들었을 때 당연히 기분도 나쁘고 불쾌했을 것”이라면서도 “공인으로서 사실은 직무수행에 관한, 혹은 그 역할에 대한 그런 비판은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폭넓게 용인된다고 하는 것을 변호사 출신인, 그것도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변호사 출신인 김 의원이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황을 짚었다.

아울러 박 전 의원은 “어떻게 보면 조금 격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공인들이 명예훼손을 내세워서 형사적인 대응이든, 혹은 민사적인 대응이든, 그런 것들을 반복하는 게 우리 정치의 사법화라고 하는 굉장히 안 좋은 선례를 남긴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또한 “정치 영역에서 상호 비판이나 비난들은 정치로 풀고, 시민들로부터 듣는 비판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소 모욕적이고, 불쾌한 표현이 있더라도 공직 수행에 관한 비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용하는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나 싶다”고도 했다.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연합뉴스

여기에 덧붙여 박 전 의원은 “외국의 경우,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명예 훼손을 당했다는 이유로 소송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지적한 뒤 “지난 정권 시절에도 이런 문제들이 있었는데, 이게 우리 사회의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이른바 ‘입막음 소송’이라고 하는 그런 부작용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이런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자신을 ‘조국 똘마니’라고 칭한 진 전 교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김 의원은 “사과할 기회를 드렸는데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회를 차주신다”며 “더 이상의 관용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의원은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무기가 되어버린 말의 대가를 잘 치르시기 바란다”며 진 전 교수에 대한 소송을 취하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김 의원은 최근 과거 자신을 ‘조국 똘마니’라고 지칭한 진 전 교수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진 전 교수는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적폐청산 어쩌고 하는 단체에서 저를 형사고소한 데에 이어, 어제 민사소송도 하나 들어왔다”면서 “원고가 민주당의 김용민 의원”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진 전 교수는 “소장을 읽어 보니 황당했다”고 말한 뒤 “이분 나한테 ‘조국 똘마니’ 소리 들은 게 분하고 원통해서 지금 의정활동을 못하고 계신단다. 그 대목에서 뿜었다”고도 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연합뉴스

이같은 진 전 교수의 언급에 김 의원은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진중권은 매우 강력한 스피커를 가진 사람”이라면서 “이런 분이 합리적 근거도 없이 모욕적인 언행을 사용했다면 당연히 책임져야 한다”고 진 전 교수에 대한 고소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은 “국민들의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파장이 다르다”고 지적한 뒤 “그래서 이런 분들은 품격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어 이를 문제제기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아울러 김 의원은 “저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표현의 자유를 위해 많이 싸워왔다. 그래서 모욕죄로 고소할 수도 있는 사안을 민사소송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며 “표현의 자유와 제 인격권의 침해는 양립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의원은 또한 “저는 민사상 청구를 했고 언론개혁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논의되는 맥락과 다르지 않다”면서 “이제라도 진중권이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소를 취하할 의향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간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진 전 교수는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가 검찰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공유한 뒤 “‘똘마니’ 표현은 의원님이 검사장들에게 써도 되지만, 일개 시민이 의원님에게 쓰면 안 된다”고 비꼰 뒤 “이제라도 김용민 의원이 이 반민주적 폭거에 사과하면 소취하를 허락할지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다”면서 사실상 김 의원이 제안한 사과를 거부했다. /김경훈기자 styxx@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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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정치,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후손들에게 식민지배 사죄하는 숙명 안겨줘선 안돼"
'전후 일본'에 종지부를 직은 것이 아베 내각의 성과 주장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간접적으로 부정하고,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더이상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는 등 다시 한번 보수·우익의 가치관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13일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우리 아이들과 손주,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안겨줘서는 안된다"며 '전후 일본'에 대한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베 내각의 현저한 성과라고 말했다.

아베 전 총리는 1993년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최초로 인정한 고노 담화를 검증해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진실에 보다 가깝게 다가감으로써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주장했다. 아베 내각은 2014년 고노 담화를 검증해 "기본적으로 계승하겠다"면서도 "협의의 의미로서 강제성에 대해 말하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언은 없었다"고 말했다.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위안부의 강제 동원 사실을 사실상 부정한 것으로 비판받았다. 지난 8월28일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7년 8개월의 아베노믹스(아베 내각의 대규모 경기부양책)를 통해 400만명 이상의 고용을 창출한 것이 최대 성과"라고 말했었다.

반면 산케이신문과 인터뷰에서 그는 "전후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아베 담화'를 통해 전후 일본의 존재방식(거듭된 사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자평했다. 일본이 언제까지 사죄외교를 반복하는 패전국인 채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베 담화는 2015년 8월14일 아베 당시 총리가 "후손들에게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을 말한다.

아베 전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 통절하게 반성하고 마음으로부터 사과한다"고 밝힌 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서도 "일본만이 주목하고 있다"며 거꾸로 식민지배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적으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지구위 전체를 넓게 볼 필요가 있다"며 "당시의 긴 역사의 흐름을 볼 때 일본은 100년에 걸친 시간의 한 축을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럽 열강의 억압을 받던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도 주장했다. 일본이 조선 등 아시아를 침략해 식민지배한 것은 서양 열강에 맞서기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은 일본 우익세력들의 전형적인 역사관이다.

그는 2016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과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결정한 한일위안부합의 등을 통해 "전후를 마무리하는게 가능했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내년 9월 자민당 총재 임기가 끝나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연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당연히 그렇다"며 "임기 만료 전 중의원 선거에서 이기면 당연히 승리한 총재가 계속 맡아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과 깊어지는 갈등에 대해서는 "중일 양국은 무역과 투자로 상호이익을 얻어왔다"면서도 "중일 디커플링(탈동조화)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현재의 틀 안에서 얼마나 중국을 억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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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정부와 업계는 추석 성수기 기간만이라도 택배 분류 인력을 충원하겠다고 했지만, 김 씨는 숨지기 전까지 분류와 배송을 모두 도맡았습니다.

근본적으로 분류 인력에 대한 책임과 비용 문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인데요.

바꿔 말하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천효정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고 김원종 씨가 근무했던 택배 대리점에 추석 성수기 인력 충원은 없었습니다.

대리점 인력은 모두 15명, 2명이 분류를 전담하는 아르바이트생인데 몇 달 전부터 이미 일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13명은 모두 택배기사로 이 가운데 10명은 배달만 했습니다.

김 씨를 포함한 3명이 아침 일찍부터 나와 분류부터 배송작업까지 도맡아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기존 인력 그대로 늘어난 추석 택배 물량을 소화한 것입니다.

[진경호/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 "(택배기사가) 1인당 40만 원씩을 분담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40만 원도 너무 아까워'라고 하면 택배기사 세 분이 이 분류인력에 투입된 거고…."]

택배 분류 작업에 대한 책임과 비용 문제가 명확하지 않아 기사가 분류작업을 안 하려면 대체 인력 고용 비용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택배노조는 대가도 없이 하는 분류작업이 장시간 노동과 과로사의 주된 원인이라는 입장인 반면, 회사 측은 배송 수수료에 분류 작업 비용까지 포함돼 있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도 적극적인 개입을 못 하고 있습니다.

특수고용직인 택배기사와 대리점 사이 계약에 개입할 근거 법령이 없다 보니 적극적으로 조사하거나 시정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수기 추가 인력이 투입된다 해도 현장 상황에 따라 택배 기사들의 과도한 노동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는 올해 안에 분류 작업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택배 표준 계약서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얼마나 구속력이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KBS 뉴스 천효정입니다.파워볼

촬영기자:김제원/영상편집:김대범/그래픽:이희문

천효정 (cheo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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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대표팀의 고려인 레전드 이야기, 재미교포 2세가 만든 다큐 <미샤>가 자세하게 전한다

[골닷컴, 미국 뉴저지] 한만성 기자 = 미하일 이바노비치 안(Mikhail Ivanovich An).

평범한 한국인에게는 듣기만 해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름이지만, 미하일 안은 1970년대 유럽 무대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100% 한국인 혈통의 '고려인' 미드필더였다. 과거 아리랑TV, KBS 등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고려인 축구 레전드 미하일 안의 일대기를 재조명한 적은 있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70년대 유럽의 강호 구소련을 호령한 그를 자세히 알지 못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다. 그러나 재미교포 2세 영화감독 브라이언 송이 제작한 미하일 안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미샤(Misha)>가 최근 공개되며 관심을 끌고 있다.

<미샤>를 통해 공개된 당시 소련 선수들은 미하일 안은 안드레아 피를로를 연상케 하는 선수였다고 말한다. 미샤의 활약상을 담은 몇 안 되는 영상을 확인해보면, 실제로 그는 중원에서 볼을 받아 공격 진영으로 찔러주는 날카로운 중장거리 패스가 돋보이는 플레이메이커였다.




[사진] 1972년 미하일 안과 그의 파흐타코르 동료들

지난 1952년 구소련 영토였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태어난 한국인 3세 미하일 안은 단 17세의 나이에 소련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그는 당시 소련 리그의 복병으로 떠오른 파흐타코르 타슈켄트에서도 9년간 주장으로 활약했으며 1978년 소련 성인 대표팀에 발탁돼 EURO 1980 예선 무대에서 두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미하일 안은 1979년 부상을 안고 있어 출전할 수 없었던 원정 경기를 앞두고 주장으로서 팀동료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가 공중 충돌 사고를 당하며 비극적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미하일 안은 사실상 소련에서 태어나 소련에서 자라며 축구 선수가 된, 한국어도 할 줄 모르는 '무늬만 한국인'인 러시아인에 더 가까운 인물로 국내에 알려졌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미샤' 제작을 위해 약 5년에 걸쳐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며 미하일 안의 가족과 만난 브라이언 송 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라이언 송은 '골닷컴 코리아'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미하일 안이 해외에 살고 있는 여느 한국인 이민 가정과 다를 게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자라지 않았을 뿐, 미샤(미하일 안의 애칭)는 한국어를 곧잘했다. 그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으로 쫓겨난 사람들이었고, 한국어밖에 할 줄 몰랐다. 내가 만난 미샤의 친형 드미트리 역시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대화했다. 미샤는 우리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던 한국인이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능력을 인정받기 전까지는 인종차별을 겪어야 했고, 이를 딛고 성공했다. 미샤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여전히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을 정도다. 우즈베키스탄은 최근 10년간 월드컵 진출에 근접했으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해 본선행을 이루지 못했다. 우즈베키스탄은 미샤가 당한 비행기 사고로 자국 최고 명문 파흐타코르 타슈켄트의 선수단 전원이 사망했다. 자국 축구를 이끌던 한 세대를 한꺼번에 잃은 셈이다. 우즈베키스탄 축구는 당시 한 세대를 잃은 후 최근이 돼서야 회복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을 다섯 차례나 방문한 브라이언 송의 취재 결과 미하일 안의 조부모는 일제 강점기 당시 함흥시에서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살던 조선인이었다. 굶주림에 지친 그들에게는 후손에게 물려줄 만한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한반도를 떠나 소련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2차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소련의 스탈린 독재 정권은 레닌그라드 지역에 자리를 잡은 고려인들을 성가시게 여겼고, 그들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으로 쫓아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8~90년대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신 적이 있다. 성공을 하시진 못했지만...(웃음) 당시 아버지가 라시아 쪽 고객들을 대상으로 행사를 열었는데, 우즈베키스탄에서 활동하는 한국 무용단을 보게 됐다. 그때는 우즈베키스탄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솔직히 '왜 그런 곳에 한국 사람이 있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 어머니가 내게 '네가 영어를 하면서 미국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그냥 러시아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고, 러시아어를 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시간이 지나며 늘 멕시코, 브라질, 쿠바, 스페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한국인들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미하일 안이라는 축구 선수에 대해 알게 됐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 팬이었다. 미하일 안의 인생 스토리가 웬지 모르게 내게는 매혹적으로 다가온 게 사실이다."




[사진] 브라이언 송 감독

브라이언 송 감독은 40년 전, 훨씬 더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미하일 안에 대해 알게 되며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막연한 호기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해외에서 태어나자란 재미교포 2세 브라이언 송 감독 또한 미하일 안의 스토리를 접하며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미샤>의 제작진에는 과거 미국 프로농구 NBA의 공식 방송 'NBATV' 프로듀서로도 활동한 브라이언 송 감독을 비롯해 영화 <친구>의 촬영감독 황기석, 미국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촬영감독 피터 콘찰이 합류했으며 헐리우드 영화 <블랙버드> 촬영감독 이은하가 편집을 책임졌다. 또한, <미샤>의 내레이션은 베트남계 미국인 헐리우드 배우 키옹 심이 맡았다. 브라이언 송 감독의 본업은 광고 영상을 제작하는 CF 감독이다. <미샤> 제작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수년간 미국의 치약 시장을 장악한 크레스트, 오럴 B 등 상업광고가 그의 전문 분야였다.

"사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고 해서 한국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세상 어디에 살고 있던 한국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대부분 비슷하다. 한국인에게는 교육, 서로에 대한 존중을 중시하는 성향이 짙다. 미하일 안을 알게 된 시점 나는 상업 광고 제작자로 활동하며 돈을 어느 정도 모아놓은 상태였다. 이때가 5년 전이었으니 당시 나는 30대 중반이었다. 우선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들과 접촉하며 취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미샤의 친형 드미트리를 만나게 됐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조사를 진행했고, 약 1년간 리서치 과정을 거쳤다. 당시 나는 생리대, 치약 광고를 만드는 반복적인 삶에 지쳐 있었다. 40대가 되기 전 모험적인 도전을 하고 싶었다."




[사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미하일 안 거리'에서 고려인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는 브라이언 송 감독

무려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고려인들에게 미하일 안의 존재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1년이 지난 지금까지 절대적이다. 브라이언 송의 전언에 따르면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어린 한국계 2세들은 '코리안 드림'을 품고 자란다. 이 때문에 미하일 안은 그들에게 자부심이자 안타까움의 상징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미하일 안의 현역 시절 업적을 알아주고,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게 그들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자라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20세기 초반 어쩔 수 없이 소련으로 가게 되며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에게는 '코리안 드림'이 있다. 미샤가 어린 시절 자란 동네에 가면 호텔 등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 중 상당수가 젊은 고려인들이다. 그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한국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거나 '결혼은 한국에서 한국 사람과 하고 싶다'는 바람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은 정작 한국에 가면 심각한 차별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처음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그들과 만났을 때도 나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다.

"미샤는 고려인들에게 영웅이다. 미샤는 고려인들에게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소련 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한 고려인 미샤 덕분에 인종차별이 지금보다 더 심각했던 6~70년대 시절 고려인들이 소련에서 더 인정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 초에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친구와 함께 이발소에 갔었다. 공교롭게도 이발사는 우즈베키스탄인이었다. 그는 내가 미샤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미샤는 우리의 위대한 주장'이었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림] 이탈리아 축구 아티스트 '사리타그래픽(@saritagraphic)'이 그린 미하일 안

더 비극적인 사실은 브라이언 송 감독이 지난 4월 <미샤>의 제작 완료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는데,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일 안의 친형 드미트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다. 이제 미하일 안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는 그의 가족은 남동생(이노켄티 안), 그리고 누나 세 명(베라 안, 클라프디야 안, 다리아 안)뿐이다. 미하일 안은 여전히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인 게 사실이다. 평생 '코리안 드림'을 품고 살아온 그의 가족이라면 이와 같은 사실을 원망스러워 할 법도 하지만(실제로 영화를 보면 미하일 안의 현역 시절을 재구성한 장면에서 그를 연기한 배우는 손자 막심 안이다.), 지난 5년간 그들을 여러 차례 만나본 브라이언 송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사진] 미하일 안의 손자 막심 안

"미샤의 가족은 매우 검소하다. 지금이야 국가대표급 축구 선수라면 수백만 달러를 받으며 호화로운 삶을 살지만, 미샤의 시절에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소련의 프로축구선수 월급은 약 50달러, 혹은 100달러 정도였다. 미샤의 가족에게는 그가 재능 있는 축구 선수였으며 고려인들에게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들은 나와 만났을 때도 미샤에 관해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내가 미샤에 대해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도 그들은 정말 기뻐했다. 그들은 내가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할 때마다 따뜻하게 환영해줬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아직 한국에서 미샤의 삶은 더 자세히 조명한 작품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다. 미샤는 누군가에게 영감이 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샤의 스토리는 단순한 스포츠 스토리가 아니라 역경을 딛고 성공한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휴먼 스토리다. 드미트리의 말에 따르면 미샤가 처음 파흐타코르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그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며 벤치에만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한 대회에서 어쩌다가 미샤의 활약상을 본 북유럽의 수많은 구단이 이후 그에게 영입 제안을 했고, 이를 계기로 드미트리는 '내 동생에게 가족과 생활할 아파트를 제공해주고 1군에서 뛰게 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크라이나나 모스크바로 떠날 것'이라고 통보하며 상황이 바뀌었다."




[사진] 미하일 안과 그의 친형 드미트리 안

그렇다면 현역 시절의 미하일 안은 어떤 선수였을까? 아쉽게도 그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당시에는 당연히 전 세계 어느 축구 선수의 활약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SNS) 채널이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다 미샤가 축구를 한 곳은 소련이었다. 당시는 소련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조차 어려운 시절이었다. 만약 그 시절 소셜 미디어가 있었다면 아마 오늘날 미샤는 훨씬 더 큰 화제가 될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는 VHS 테이프가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이 때문에 테이프가 부족하면 이미 다른 영상이 녹화된 테이프를 다시 쓰곤 했다고 한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기록을 남기기 위해 영상 파일을 저장해놓고 자료화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동양인이었던 미샤는 소련 선수들과 비교해 키가 작았고, 신체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특히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듯이 그는 선수 시절 초기에는 왼발을 전혀 쓸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나며 180cm이 넘는 꽤 건장한 미드필더로 성장했고, 북유럽에서 양발을 가장 잘 쓰는 미드필더 중 한 명이 됐다. 미샤는 말이 적은 조용한 동료였지만, 어린 나이에 주장이 됐을 정도로 리더십이 탁월했다고 한다. 과거 미샤와 함께 뛴 선수들과 얘기를 해보니 그는 운동장 안에서 팀동료들을 챙겼을 뿐만이 아니라 동료들이 가족 문제, 경제적인 문제, 사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선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하일 안의 목숨을 앗아간 비행기 사고가 더 안타까운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미하일 안에게는 생전에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데에 대해 큰 공포증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미하일 안은 사고를 당하기 훨씬 전부터 비행기에 타면 자주 원정길에 동행한 파흐타코르 수석코치의 아내 앨라 세르게에프나와 러시아 카드게임 두라크(durak)를 하며 두려움을 떨쳐냈다고 한다. 그러나 늘 파흐타코르가 원정을 떠나면 선수단과 함께 원정길에 오른 앨라는 운명의 장난처럼 1979년 우크라이나행 비행기에는 당시 개인 사정으로 몸을 싣지 않았고, 그녀의 남편과 미하일 안 등 파흐타코르 선수단을 포함해 이날 탑승한 승객 178명은 전부 사망했다. 브라이언 송의 <미샤>는 사고 후 41년이 지난 현재까지 자신의 남편과 아들 같은 파흐타코르 선수들을 갑작스럽게 잃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알라스의 인터뷰까지 담고 있다.




[사진] 앨라 세르게에프나

"드미트리와 알라스의 말에 따르면 미샤는 늘 비행기를 타는 데 거부감이 있었다고 한다. 알라스는 미샤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늘 비행 도중 그와 카드게임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 도중 비행기가 흔들리면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미샤는 이 사고에 앞서 미국 LA, 샌프란시스코 원정 경기를 치르며 미국, 멕시코 팀들을 상대했는데, 당시 소련에서 미국으로 가던 비행기가 심한 난기류에 휩쓸려 크게 흔들리며 가뜩이나 심했던 비행 공포증이 더 심각해졌다. 이후 그는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벨라루스, 조지아 등 원정 경기를 위해 비행기에 탈 때마다 두려움을 떨었다고 한다. 더 신기한 사실은 그가 사고를 당한 우크라이나 원정길에 오를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미샤는 이날 부상 때문에 경기에 출전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장으로서 팀 분위기를 생각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탄 비행기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미샤>는 독립 영화로 제작된 만큼, 브라이언 송 감독은 앞으로 수많은 영화제(film festival)에서 자신의 작품을 소개할 계획이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국내에도 미하일 안의 스토리를 알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기 전 마지막으로 그에게 아직 국내에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미하일 안에 대해 궁금해하는 축구 팬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 마디가 있느냐고 물었다.

"우선 <미샤>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mishathedoc)을 팔로우해주셨으면 좋겠다(웃음). 우리는 단순한 스포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휴먼 스토리를 담아 <미샤>를 만들었다. 열린 마음으로 영화를 봐준다면, 한번 보고 잊을 만한 작품은 절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영화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더 어려운 건 완성된 영화를 대중에 알리는 일이다. 딱 한 마디만 더하고 싶다. 사는 곳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한국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서적으로 다를 수 있고, 한국어를 잘 못 하더라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비슷한 점도 많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한다."동행복권파워볼




글/인터뷰=한만성
사진=브라이언 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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